山 城 面 沿 革 山城面은 상고시대부터 나도에서 義城·安東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八公山 기슭에 좁고 토박한 땅에서 농업을 주로 하며 살아 왔다. 본래 부계현의 동쪽이 되므로 缶東面이라 하여 余佐·牙致·薪嶺·凡中·凡下·沓洞·全歸·小上·小下·凡朴·反內의 11개 동리를 관활 하였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身南面의 40 稷田·上本·下本·新基·山皐·山城·元堂·上儉·下儉·河陽의 10개 동리와 中里面 校前洞 일부와 小首面 河田洞 일부를 병합하여 八公山城의 이름을 따서 山城面이라 하였다.이 때부터 군위군에 편입되어 무암· 운산·삼산·백학·봉림·화전·화본·원산·금양의 9개 동으로 개편 관활하게 되었다.1983년 2월 15일 행정 구역 조정 개편으로 元山洞과 錦陽洞은 義興面으로 개편 분리되어 현재는 白鶴洞·三山洞·鳳林洞·武岩洞·雲山洞·花本洞·花田洞 등 7개 동으로 되어 있다.山城面의 동쪽은 고로면과 영천군 신령면, 남쪽은 부계면과 영천군 신령면, 서쪽은 부계면과 우보면, 북쪽은 의흥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琴道淵) 武 岩 洞 남자리·여좌리(余佐里)·여좌동(余佐洞)·남전(藍田)§1670년 崔東軒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余佐里라 하였다. 남자리 뒷산 중턱 바위 틈에 부엉이가 떼를 지어 살았으며, 어둠이 깔리면 그곳에 접근하지 못했으며 지금도 부엉이 굴의 흔적이 남아있다. (金在馹: 男 83 外 4名) 새터· 아래꼴짝·신기(新基)§남자리에서 분리되어 새로 형성된 자연부락이다. 마을 뒤에 옻물탕이 있고 마을 개척 당시 산줄기에 조그만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는 데 옻을 타는 사람들이 그 물을 떠다가 피부에 바르면 나았으며 지금은 농토 개척으로 물은 나지않고 물탕만 있다. (琴柱淵: 男 61 外4名) 옥정(玉井)§마을이 꼭 우물 같이 생겼다고 玉井이라 했다 하며, 샘을 팔 때 옥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이 마을 내에 우물을 파면 불길 하다고 전래되어 마을 앞 개울가에 솟아나는 물을 식수로 했음에 유래된 명칭이라 한다. 샘 앞에 蓮花가 있어 玉井蓮花라 불렀으며 신선이 내려와 연을 캤다고도 한다. (申浩均:男 66外 4名) 아치골·아치동(牙致洞)§缶東面·新南面을 합하여 山城面을 이루었는데 그당시 缶東面의 소재지였다. 마을 옆산의 모양이 虎牙같이 생겼으므로 이렇게 칭하며 (山如虎牙故曰牙致洞)의 유래가 있다. 古老面 용아동에서 용이 났다는데 용이 승천하다가 용의 어금니가 이동네에 떨어져 동네가 번성하게 되었다고 牙致洞이라 하기도 한다. (洪潤植) (金泰鳳 : 男 64 外 4名)
41 白 鶴 洞 전거리·전구리·전귀동(全歸洞)·전귀리(全歸里)§永川·新寧에서 安東·서울로 통하는 길로서 온전히 돌아오라는 뜻으로 全歸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어귀에 작은 못이 아주 옛적부터 있었는데 全歸里라는 마을 이름과 같이 전귀리못이라 불렀는데 다른곳에서는 全구리 (銅)로 만든 못으로 와전되어 불려지기도 했다.현 白鶴洞 어귀에 있는 동제를 지내는 당나무 일대를 거릿대라 불렀다고 한다. 全歸里 마을 뒷산에 옛날 봉화대가 있어서 新寧·孝令의 봉화대와 연락이 되었다고 한다. 白鶴洞 입구에 金寧 金氏의 효자각이 있는데 金聖玉의 정려각이라 한다. 金聖玉이 폭우로 인하여 崩山되었을 때 부모를 업고 산상으로 옮겨 기적적으로 피신한 효성이 있었다고 한다. 全歸里 입구에 白鶴岩이 있는데 옛날에 백학이 서식했다 한다. (李成允 : 男 68 外 4名) 서내·선래(仙來)·소상동(蘇上洞)·소하동(蘇下洞)§그 유래는 미상이며 일명 소상· 소하동이라는 유래는 인가가 생기기전 蘇下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서 윗마을을 蘇上, 아랫마을을 蘇下라 하였다. 八公山 한 골짜기에 용이 나왔다는 용남골이 있는데, 그 골짜기에는 바위굴이 하나있어 기우재를 지냈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 坡平 尹氏가 거주하기 시작하여 묘지와 비석만 남았있고 현재는 密陽 朴氏 20가구가 살고 있다. (金斗鉉) (李相殷 : 男 67 外 4名)
鳳 林 洞 범복원·범박골·범박동(凡朴洞)§옛날에 鳳林역 근처에 집 한 채를 院으로 정해 凡朴院이라 했다가 그 뒤 凡朴洞으로 불렀다. 그런데 凡朴洞의 이릉이 좋치않아 鳥林山을 중심으로 숲이 우거지고 범이 칡을 타고 새들이 많이 지저귀므로 鳥林山이라 하여 鳥字에 를 씌운 鳳字를 써서 鳳林洞으로 개칭했다. 옛날부터 한건하기로 유명하여 비가 오다가 鳳林洞에 오면 다른곳으로 가버릴 정도로 한건했다고 하며, 처녀가 출가할 때까지20년동안 백미 서말, 부자집에서는 한섬 정도 밖에 먹지못하고 시집갔다고 한다. (李克烈 : 男 62 外 4명) 반외동(班外洞)§반외동은 현재 鳳林2洞이며 임진왜란 당시 도적이 날로 괴롭혀 2Km 떨어진 지역인 속칭 용이 승천한 곳이라 하여 龍堂谷이라 하고 그곳에 몇가구가 살아 왔는데 임진 왜란 후에 농사를 짓기 위해 龍堂谷 밖으로 나왔다고 하여 班外洞이라 했다. (金斗鉉) (崔敬春 : 男 79 外 4名)
三 山 洞 삼산(三山)·범하동(凡下洞)§이 지역의 다른 동네에서는 八公山과 花山·鳥林山(새림산)이 보이지 않으나 이 마을에서는 이 세 산이 다 보이므로 삼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일명 범하동이라고도 하였다. (金 俊 : 男 52 外 4名) 범실(凡室)·범상동(凡上洞·帆上洞)§武岩洞 윗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42 이 마을은 풍수학설에 의해 범상스럽다고 해서 이름을 처음에는 범실이라 하였다. 한편 이마을 전체의 모양이 行舟形 즉 배가 떠있는 모양 인 범선과 비슷하므로 범상동이라고도 한다. (金斗鉉) (金泰佑 : 男 68 外 4名)
雲 山 洞 새마아·새마을·신기(新基)§옛날 본동인 섭재에 비하여 후에 생겼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섭재 남동쪽에 위치하며 초당골과 큰골과 같이 섭재에서 분가한 이름이다. (李有德 : 男77 外 4名) 섭재·큰마아·신기(新基)·신령동(薪嶺洞)§雲山 본동으로 인근 부락에서 큰마아라고 부른다. 朴秀祭이란 선비가 약 300년 전에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에 우거진 숲을 베어내고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섭재라 칭하였으며, 250년 전에 永川 李氏가 全羅道로 이주하다가 이곳에 머물렀다 한다. 永川 李氏는 구름과 산이 겸비해야 잘 산다고 하여 雲山洞으로 개칭하였 한다. 200년 전에 洪同知라는 장군이 아침에 장곡지를 완공한 다음에 조반을 들고 집으로 가던중, 한짐의 흙을 부은곳이 지금의 벌못이 되었다다 한다. 정골이라는 골짝이가 있는데 鄭氏라는 한 여인이 남편이 전쟁에 가고 오지 않아 앞치마에 돌을 담아서 전쟁터로 가던 도중에 이곳에 부었다고하여 정골이라 했으며 지금도 많은 돌이 있다. (李定洛 : 男 75 外 4名) 초당골·초당(草堂)§옛날 草堂이라는 스님이 이곳을 지나면서 냉수를 먹고 싶어 바위를 파내고 샘물을 마시고 갔다 하여 草堂谷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그 샘터가 있으며, 장마나 가뭄에도 수량에 변화가 없다. 무지개골이란 아주 크고 선명한 무지개가 이 골짝에 뿌리를 박았다 하여 무지개골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任翼宰 : 男 69 外 4名) 큰골·대곡(大에)§계곡이 크다고하여 생긴 이름이며, 永川 李氏들이 주성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 뒷산에 꽃밭림이라는 곳에 묘가 셋(큰것1, 작은것2)있는데 옛날 상전이 죽자 살아 있는 종을 생매장 했다고 전한다. (洪潤植) (李泰哲 : 男 61 外 4名)
花 本 洞 춘못·상동(上洞)·최문대(崔門垈)§中洞 위 에 위치한 마을로서 平山 申氏와 慶州 李氏가 주성을 이루며 마을 동쪽에 谷內池(골안못)가 있고 德林寺란 절이 있다. 이 절은 신라시대 사찰이며 200년전 林養山이란 중이 이 절을 개수했다. (朴泰岩 : 男64 外 4名) 중동(中洞)§上洞과 下洞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서 1479년 경 嚴光舜이라는 선비가 이마을을 개척하여 지은 이름이다. 엄광순은 부친되는 영월호장 嚴興道가 端宗을 매장하고 世祖의 국령을 어긴 죄로 강원도 영월에서 정처없이 망명하여 아버지는 淸州서 사망하고 이곳으로 피신하여 살면서 이곳을 춘못(崔門垈)이라 했다. 寧越 嚴氏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嚴在植 : 男75 外4名) 신내미·하동(下洞)·화본(花本)·본동(本洞)·신남면(新南面)§山 43 南面 소재지가 되는 마을이다. 鳥林山 來脈에 (山如花根故花本)이라 했다. 1914년에 元山·錦陽·花田·花本을 합하여 新南面이라 부른 것이 신내미 이다. 이 마을에서는 본동이라 부르며, 마을앞에 마을을 수호하는 고목이 있어 연1회 동제를 지낸다. 여기에는 팔공산 북문성을 축조하려고 바위를 운반하던중 여자의 입에서 재수없는 말이 나와 두고 간 바위들이 논 한가운데 여러개 놓여있다. (洪潤植) (李允鎭 :男66 外4名)
花 田 洞 피밭골·안마을·안마·화전동(花田洞)·직전동(稷田洞)§산성면 화본동에서 북동쪽으로 800,1000m 내외의 지역을 이르며 錦花宜土故曰花田이라 했다. 이마을은 예로부터 황무지이고 피(稷)가 많이 자생되어 있었기에 피밭골이라 했다. 이 마을은 화전동의 기본이 되는 마을로서 안마을·안마라 불리워진다. 1356년 恩律 宋氏가 개척하였고, 부근에 고려장이 있었고 密陽 朴氏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宋台源 : 男 67 外 4名) 화진개·화진기·바깥마을·화수곡(花樹谷)§피밭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피밭골에서 분리된 동네이다. 예로부터 목화가 잘 자랐고, 450년전 이 골짜기에 꽃나무가 많았으므로 화수골이라 했다. (孔範植 : 男71 外4名) 소정골·소정곡(小亭谷)§피밭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동시에마을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골짜기 산 등마루에 정자가 있었다 하여 생긴 이름으로 전한다. (洪潤植) (沈福錄 : 男 64 外 4名)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