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모래밭에서 어떻게 사나…” 1971년 10월 15일 오후,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분양받는 예비입주자 가족들은 단지를 둘러보고 걱정부터 앞섰다. 서울 도심에서 들어오는 버스 한 대가 없고 주변에는 온통 모래벌판 뿐인 곳에서 과연 살 수 있을지 한숨만 나왔다. 통신회선이 부족해 전화 걸기도 불편하고 변변한 상가도 없어 물건을 사려면 다리를 건너 노량진쪽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도 단지 규모는 큰 편이었다. 287만㎡(87만평)의 거대한 택지에 12층짜리 아파트 24개동이 불쑥 솟아있었다.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12층 아파트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 |
초고층 아파트의 시작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971년에 발표된 여의도 종합 개발계획안에 따라 ‘아름다운 신시가지’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시작돼 결실을 맺은 첫 작품이었다. 서울 초고층 아파트의 최초의 시도를 추적하다 보면 바로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만난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이야기하면서 여의도를 빼놓을 수 없다.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 2003)에 따르면 1967년 여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강변북로 너머 여의도를 개발하면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선거유세나 가끔 열리던 넓은 백사장에 불과했던 여의도를 대규모 택지로 개발하기 위해 서울시는 1968년 2월, 밤섬을 폭파했다. 여기서 나온 11만4000t의 돌로 여의도와 한강 사이 제방을 쌓았다. 1970년, 지금의 마포대교인 서울대교 준공으로 여의도는 ‘육지’로 다시 태어났다. 세운상가(1966년), 청계고가도로(1967년)를 설계했던 건축가 김수근씨는 국회와 종합병원이 있고 사람은 2층으로, 차는 1층으로 다니게 하는 보행자용 인공데크까지 갖춘 혁신적인 여의도 개발 마스터플랜까지 내놓았다. | |
- 1 여의도 백조아파트 2 여의도 삼부아파트 3 여의도 시범아파트
하지만 정작 땅이 팔리지 않았다. 서울시에서는 여의도에 조성한 택지를 민간에 팔아 부족한 재정을 충당할 계획이었지만 사겠다는 업체가 없었다. 고심 끝에 서울시가 먼저 튼튼한 고급 아파트를 짓기로 했고 1971년 10월 착공 1년 만에 24개동 1584가구 규모의 ‘시범아파트’를 준공했다. 12층 높이의 시범아파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지은 아파트 중 가장 높았다. 최신식 아파트로 불리던 이촌동 공무원아파트도 5~6층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세대마다 냉온수 급수, 스팀난방 시설을 갖췄다. 파출소, 쇼핑센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지 가까이에 들인 배치 방식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였다. 여의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여의도 중학교, 여의도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하는 특수학군제 때문에 사람들은 여의도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시범아파트 입주자 어머니의 70%이상이 대학졸업자라는 조사결과가 나올 정도로 고학력자, 전문직 종사자가 모여들었다. | |
아파트는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집이라는 시범을 보이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가장 큰 158㎡(40평)형이 571만원, 소형인 59㎡형이 212만원 선에 분양되었는데 입주 시작 후 두 달만에 158㎡형의 가격이 1000만원을 넘어섰다. 여의도시범아파트의 인기가 높아지자 민간업체들도 택지를 사서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삼익주택이 1974년 시범아파트 남쪽에 삼익아파트(360가구)를, 한양주택이 은하아파트(360가구)를 지었고 대교아파트, 삼부아파트, 라이프아파트가 뒤를 이었다. 1970년대 후반 중동건설경기 호황으로 늘어난 유동자금이 여의도 아파트로 몰려 ‘투기열풍’을 빚기도 했다. 1977년 목화아파트 청약 경쟁률은 45대1를 기록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20세기 생활문화변천사>에 따르면 한 부동산업자가 89㎡짜리 아파트 100채를 현금 2억 원을 내고 신청하는 일도 있었다. 청약결과 발표현장은 ‘당첨되면 프레미엄(당시 표기)을 붙여 팔아주겠다’고 명함을 돌리는 중개업자들로 북적였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생긴 ‘아파트에 대한 불신’을 씻기 위한 취지에서 태어났지만 파급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아파트는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집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시범아파트의 성공으로 민간 업체들이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 |
‘신시가지’ 여의도의 어제와 오늘
시범아파트가 들어선 후 여의도 개발계획도 착착 진행됐다. 1975년, 국회의사당이 준공됐고 KBS 제2방송국(당시 동양방송)은 1980년 문을 열었다. 1979년에는 15층 규모의 증권거래소 건물이 완성되면서 여의도는 금융 중심지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야간인구 4만명, 주간인구 18만명으로 북적이는 신시가지를 만들겠다는 1970년대의 구상은 2009년 현재 거의 목표치에 도달했다. 여의도동에는 2008년 기준으로 1만1699가구, 3만2591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여의도는 최근 ‘제2신시가지’로의 비상을 꿈꾼다. 서울시에서 지난 1월 한강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한강공공성회복선언’을 발표하면서 여의도를 전략 정비구역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여의도 공원 동쪽으로 시범, 삼부, 삼익아파트 등 11개 단지 6327가구가 재건축 대상이 됐다. 2010년 이후에는 새로 건립되는 재건축 아파트들로 여의도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
글 장박원, 이유진 / 매일경제 기자
출처 : 아파트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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